신변잡기(身邊雜記)/역사 이야기

印信謄錄(인신등록)

kazelnight 2009. 9. 5. 04:24

 

 

관인의 규격 (출처 - http://www.memorykorea.go.kr/injang/injang2_02.html)
관인의 규격은 태종 때 여러 관부의 인장 규격을 다시 정하였다. 태종 3년(1403) 예조에서 여러 관부의 인신제도를 정할 것을 신청하였다. 왕과 중서문하의 인은 방(方)이 2촌 1푼(6.02㎝), 추밀(樞密)·선휘(宣徽)·삼사(三司)·상서성(尙書省) 등 제사(諸司)의 인은 방(方) 2촌(5.73㎝), 절제사(節制使 : 3품)는 1촌 9푼(5.44㎝), 나머지 인은 모두 1촌 8푼(5.16㎝), 경성(京城) 및 외직사(外職司) ·논교(論校) 등의 인은 길이가 1촌 7푼(4.88㎝), 너비가 1촌 6푼(4.58㎝), 본국의 1품 아문은 중조의 추밀(樞密)의 예에 의하여 그 인이 방 2촌(5.73㎝), 2품아문은 1촌 9푼(5.44㎝), 3품아문은 1촌 8푼(5.16㎝), 4품아문은 1촌 7푼(4.88㎝), 5품아문은 1촌 6푼(4.58㎝)이고, 참외아문(參外衙門)은 1촌 5푼(4.3㎝)으로, 즉 1품 아문 방 2寸(5.73㎝), 2品 아문 1寸 9푼(5.44㎝), 3품 아문 1寸 8푼(5.16㎝), 4품 아문 1寸 7푼(4.88㎝), 5·6품 아문 1촌 6푼(4.58㎝), 7品 이하 아문 1촌 5푼(4.3㎝)으로 하되 그 촌·푼은 예기척(禮器尺)에 의하였다. 
(경국대전이나 대전회통의 禮典-用印 부분을 보면 관인규격은 위와 많이 다르다.)

 

태종 5권, 3년(1403 계미 / 명 영락(永樂) 1년) 2월 11일(무오) 1번째기사

예조의 건의로 여러 관부의 인장 규격을 다시 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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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관부의 인신(印信)의 제도를 정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신청(申請)하기를,
“예전 제도에 관부의 인장(印章)은 품(品)에 따라 등급이 있는데, 지금 사평부(司平府)에 선사(宣賜)한 인(印)과 사섬서(司贍署) 제조(提調)의 인(印)은 국새(國璽)보다 더 크니, 예전 제도에 어긋납니다. 원컨대 본조(本曹)로 하여금 중외(中外)의 각 아문(衙門)의 인신을 조사하게 하여, 만일 제도에 어긋난 것이 있으면, 일체 모두 고쳐 만들게 하소서. 중조(中朝)의 예전 제도에 제왕(諸王)과 중서문하(中書門下)의 인(印)은 방이 2촌(寸) 1푼(分)이고, 추밀(樞密)·선휘(宣徽)·삼사(三司)·상서성(尙瑞省)의 제사(諸司)의 인(印)은 방(方)이 2촌이고, 절제사(節制使)는 1촌 9푼이고, 나머지 인은 모두 1촌 8푼이며, 경성(京城) 및 외직사(外職司) 논교(論校) 등의 인은 길이[長]가 1촌 7푼, 너비[廣]가 1촌 6푼입니다. 본국(本國)의 1품 아문(衙門)은 중조(中朝)의 추밀(樞密)의 예(例)에 의하여 그 인(印)이 방 2촌, 2품 아문은 1촌 9푼, 3품 아문은 1촌 8푼, 4품 아문은 1촌 7푼, 5품 아문은 1촌 6푼이고, 참외 아문(參外衙門)은 1촌 5푼인데, 그 촌푼은 악기(樂器)를 만드는 자[尺]에 의하여 썼습니다. 경·외관(京外官)과 출사원(出使員)의 인신(印信)이 이 제도에 합하지 않는 것이 있거든 모두 고쳐 만들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윤허하였다.【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257면【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고사(故事)

 

印信謄錄(인신등록)

조선숙종·영조대에 官印을 관장한 예조와 印信을 주조한 공조에서 각 지방관과 중앙관서의 요청으로 印信을 주조하여 下送하였을 때의 기록이다. 예조에서 지방관 및 중앙관서에서 올린 공문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다. 책별 수록 년대는, 제1책은 1679년 (숙종5) 1월·1692년 8월, 제2책은 1744년(영조 20) 1월·1756년 12월이다. 각건의 내용은 (1)印信의 주조가 필요한 관청의 印信 주조 요청, (2)印信주조후 입계, (3)주조된 印信의 下送, (4)구印信은 인文을 削篆하여 上送하는 순서로 되어 있으며, 모두 啓目으로 처리되었고, 頭註가 있다. 예조에 印信鑄造를 요청하는 관청은 원칙적으로 印信을 사용하는 모든 京外의 관청이 포함되고 있으며 그 요청내용은 印信의 改鑄와 新鑄로 나눌 수 있다. 印信의 改鑄요청은 구印信의 年久사용, 각 관청의 陞號·降號·復號, 印信의 見失 등의 경우이고, 新鑄요청은 각 지역에 소모별장·둔전별장·첨사·만호 등이 신설되거나 각 도감이 설치되어 당상·낭청이 사용할 印信이 필요할 경우에 있었다. 印信의 주조와 下送에 관한 것 외에 印信에 얽힌 일화도 들어 있다. 즉 제2책에 기록된 1747년(英祖 23) 1월 25일 부터 1월 27일까지의 기록에는 경상우병영에서 임진왜란 때 경상우수사 최경회가 抱印投江하였을 때의 印信을 발견하여 上送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왕은 최경회의 충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御製古印銘幷序>를 짓고, 古印은 경상우병영에 보내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필사본/규장각

 

印信謄錄(인신등록)

1797년(正祖 21) 6월·1870년(고종 7) 12월 사이에 예조와 공조에서 각 관청의 印信을 주조 下送한 기록이다. 각 책별 수록년대는 다음과 같다. 제1책:1797년 6월·1817년(순조 17) 12월, 제2책:1818년 1월·1842년(헌종 8) 10월, 제3책:1843년 1월·1854년(철종 5) 11월, 제4책:1855년 1월·1870년 12월. 수록문건의 형식은 앞의 [奎12919의 1]本과 같으나 頭註가 없다. 각 문건뒤에 新鑄 印信의 印文이 찍혀 있어 印信의 字體와 규모를 살필 수 있다. 조선시대/필사본/규장각

 

 

최경회에 대하여...

 

선수 27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6월 1일(갑신) 11번째기사

경상 병사 최경회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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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崔慶會)는 자는 선우(善遇)로 능성(綾城)에 살며 문과(文科)에 올랐는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전란 초에 그는 집에서 거상(居喪) 중이었는데, 고경명(高敬命)을 이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이때 전(前) 임실 현감(任實縣監) 임계영(任啓英)도 군사를 일으켰다. 최경회는 좌도의 의병을 거느리고, 임계영은 우도의 의병을 거느렸다. 호남이 이미 안정되자 두 장수는 모두 달려가 영남을 구원하였다.
 
최경회는 동서로 적을 초토하느라 1년 넘게 노숙하였으나 뜻이 조금도 태만해지지 않았다. 병사(兵使)에 승진되어서는 처사가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였다. 김천일과 함께 통수(統帥)가 되어 같이 있으면서 명령을 내렸는데 한 번도 상반되는 적이 없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막사(幕士) 문홍헌(文弘獻) 등과 함께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좌찬성(左賛成)에 추증되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5책 642면【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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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관청에서 사용되던 도장을 주조하여 발급하던 일에 관계된 일체의 업무를 기록한 책. 필사본. 담당 관서인 예조에서 작성하였다.

해당 날짜별로 일지식으로 정리한 것으로서, 대개 예조에서 임금에게 보고하는 계목(啓目)과 그에 대한 임금의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감결(甘結) 등 다른 관청과 주고받은 공문서를 등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간혹 해당 업무에 대해 조정에서 논의된 사항을 실은 경우도 있으며, 또 새로 발급한 도장을 찍어 첨부하기도 하였다.

 

내용은 새로운 인신이 필요한 중앙과 지방 각 관서의 요청, 인신의 주조와 발급, 옛 인신의 폐기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작성되었을 것이나, 지금은 영본(零本) 2책으로 된 것과 4책으로 된 것 두 종류가 전해진다.

 

먼저 2책본의 제1책은 원래의 등록 제2책으로 작성된 것으로 1679년(숙종 5) 1월에서 1692년 8월까지의 업무를 수록하였다. 제2책은 1744년(영조 20) 1월에서 1756년 12월까지를 실은 것으로서 원래의 제4책에 해당한다. 특히, 이 책에는 임진왜란 때 투신자결한 최경회(崔慶會)의 인신이 1747년에 발견된 일이 수록되어 있다.

 

4책본의 제1책은 1797년(정조 21) 6월부터 1817년(순조 17) 12월까지, 제2책은 그 이후부터 1842년(헌종 8) 10월까지, 제3책은 1843년 1월부터 1854년(철종 5) 11월까지, 제4책은 1855년 1월부터 1870년(고종 7) 12월까지의 업무를 수록하였다.

특히, 이 4책은 새로 발급한 도장을 검은색 혹은 붉은색으로 선명히 찍어 첨부한 뒤 그 글자를 밝혀 놓아 당시 전국에서 사용된 인신(印信)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모두 판심(版心 : 版心魚尾라고도 하며, 판각본이나 인찰지 등의 양면 사이 한 가운데 정간에 인쇄하는 일정한 도형)에 ‘禮曹(예조)’라고 날판된 용지를 이용했으며, 매장마다 관인을 찍어 착오를 방지하였다. 조선 후기 정부 행정의 일면과 전각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모두 규장각도서에 있다.